미두왕 반복창의 인생 이야기 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 적은 없다.
여러 곳에 사료로 남겨져 있는 미두왕 반복창의 인생을 정리해보았다.
조선시대의 미두시장 – 도박장처럼 운영되던 자본시장
반복창이 미두왕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은 바로 ‘미두시장’ 때문이다.
반복창은 미두시장에서 엄청난 돈을 벌면서, 미두시장의 패왕이라 불렸다. 그가 번 돈은 당시 돈으로 40만 뭔, 현재 가치로 약 500억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그가 돈을 벌었던 미두시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에는 자본시장을 조성한다는 명목 하에 조성되었다. 미두는 간단히 말해서 ‘쌀 가격’을 맞추는 일종의 선물거래 시장이다.
오사카와 도쿄에서 거래되는 쌀 가격을 기준으로 조선의 양곡 매입가격을 결정했기 때문에 설치된 기관이다.
본래 인천의 상인들이 운영하는 시장을 통해 양곡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일제가 강제로 미두취인소를 설치하면서 직매입/거래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곡식 가격’을 조정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10%의 증거금으로 대규모의 곡식을 사고팔 수 있어서 사실상 도박판처럼 운영이 되었다.
양곡을 거래하는 곳이었지만 실제 현물을 거래하진 않고, 차액에 해당하는 돈만 거래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현대의 선물거래소와 아주 비슷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인천에 ‘미두취인소’가 설립된 뒤에는 돈이 있는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중매점’이 설립되었다. 중매점이란 미두취인소에서 직접 거래를 하는 중개회사를 말한다.
반복창의 미두인생 시작 – 아라키의 하인
일제 강점기 조선과 일본 사이의 곡물 운송으로 돈을 벌었던 일본인 ‘아라키’는 자신의 이름을 건 아라키 중매점을 차리고 미두거래를 하였다. 그리고 이 아라키의 집안에 열 두살의 반복창이 하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반복창은 강화도 이방의 아들로 태어나 괜찮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한일합방으로 아버지가 실직하게 되자, 가세가 기울며 하인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반복창은 아라키의 아이를 돌보다가 2년 뒤, 요비코(미두 시세를 전하는 역할)로 아라키의 회사에 들어가게 된다.
반복창은 아라키가 주는 월급을 악착같이 모으며 자신도 미두거래를 통해 큰 돈을 벌겠다고 다짐한다.
반복창은 스스로 미두시장을 공부하며 시장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똑똑했던 반복창을 지켜본 아라키는 4년 만에 반복창을 바다지(시장대리인)로 승격시킨다. 지금으로 치자면 증권사에 입사하여 백오피스(지원부서)에 있다가 펀드매니저로 승진한 셈.
반복창이 바다지로 승진하자, 때마침 1차대전도 마무리되어 일본 경제는 대호황을 맞이하였다. 그래서 반복창이 바다지로 참석한 미두시장 역시 엄청난 돈이 몰리게 되었다.
시장이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아라키 역시 판을 키워가며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그는 배를 운용하며 돈을 벌었던 경험이 있어서 ‘날씨’를 보고 곡물가격을 예측했다고 한다.
아라키는 자신의 경험으로 점점 많은 돈을 쏟아붓던 중, 쌀 가격이 자신의 예측과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엄청난 손해를 보기 시작한다.
아라키는 내린 가격은 결국 오른다는 믿음으로 계속 쌀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쌀 가격은 계속 폭락을 하면서 그는 180만 원(현재 가치로 약 2000억 수준)의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하게 된다.
미두시장이 선물거래인만큼, 아라키가 부도낸 180만 원이란 금액은 반대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받아갈 돈이었다.
이 덕분에 미두시장은 아라키의 180만 원을 포함하여 약 300만 원(약 현재 가치로 4000억에 해당) 부도 금액으로 인해 3개월 간 영업정지를 당했다. 3개월 뒤, 미두취인소는 자본금을 100만 원으로 늘려 다시 문을 열게 된다.
미두왕으로 등극한 반복창
아라키의 패망을 똑똑히 지켜보았던 반복창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열린 미두시장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아라키 밑에서 힘들게 모았던 돈으로 미두시장에서 마바라(개인투자자)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미두시장도 다시 불타기 시작하고, 반복창은 여기서 큰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 동안의 공부로 다져진 기막힌 시세예측으로 수 십 만 원을 벌어들이기 시작한다. 한 번의 거래로 18만 원(현재 시세로 약 200억)을 벌었던 것이 엄청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반복창의 재산은 점차 늘어나서 40만 원에 육박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반복창은 ‘미두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엄청나게 불어난 재산으로 떵떵거리며 살게 된다. 고향인 강화도의 전답을 사기도 했고, 일본인 창기들을 조건없이 양민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는 등 언제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반복창은 그의 존재 자체가 미두시장에서 화제가 될 무렵, 모은 돈으로 자신이 살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20만 원을 들여 조선에서 가장 화려한 집을 지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집의 안주인을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그 안주인이 바로 당시 사교계에 가장 유명한 미인이었다고 알려진 ‘김후동’이라는 여인이었다. 반복창과 동갑이었지만 부잣집 딸로 살아온 김후동은 반복창과는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온 여인이었다.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김후동의 마음을 산 반복창은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될 정도의 호화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자신의 지인들을 모두 기차로 서울로 초대하고, 서울 시내의 자동차 1/3을 동원한 초호화 결혼식을 열었다.
그의 결혼식에 초대된 인물들은 모두 힘 좀 있다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미두신 반복창의 몰락
미두왕을 넘어 미두의 신이라고 추앙을 받던 반복창은 결혼 이후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그 이전과 달리 시세 예측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측의 실패는 조금씩 결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몇 만 원의 손실이 몇 십 만원의 손실로 나타났고, 만회 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순식간에 파산 직전에 몰리게 되었다.
그가 재산을 불린 것도 단 1년이었지만, 그렇게 사라진 것도 겨우 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반복창은 집 공사도 중단시키고 400평의 땅에 네 칸짜리 움막으로 마무리 되어버린다.
반복창은 이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투자금을 모아 다시 큰 거래로 만회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따르던 후배들과 함께 돈 많은 유지를 꼬드겨 돈을 받아오기로 계획을 세운다.
반복창은 기생집에서 온갖 유흥을 제공하며 자신의 집을 어음으로 사라고 하였지만, 이 모든 게 사기로 드러나면서 감옥에 가게 된다.
반복창은 곧 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이로 인하여 아무에게도 투자받을 수 없게 된다.
미두시장을 떠나지 못한 반복창은 미두장 근처에 열리는 사설 미두장에서 소액거래를 하는 ‘합백꾼’들과 어울린다.
미두왕에서 미두신까지 추앙받았던 반복창이 ‘합백 대장’으로 불리며 거리에 있는 모습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반복창의 결말 – 잔인한 이혼과 사망
반복창과 결혼했던 김후동은 자신이 돈 때문에 결혼한 것이 아니란 점을 보여주고자 몰락하는 와중에도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주변인들과 언론인터뷰에서도 항상 ‘행복하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생활고가 점차 심해지고, 남편인 반복창이 길거리 도박꾼으로 나앉게 되자 그녀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이혼한다.
반복창은 결국 1927년 아이 셋만 남은 알거지로 돌아갔다.
반복창은 그 이후로도 미두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을 떠돌다가 서른의 나이에 중풍으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일본은 쌀을 전수물자로 관리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38년에는 미두시장을 정지시켰고, 1939년에는 쌀 가격을 정부가 관리하게 된다.
반복창은 미두시장이 정지되기 20일 전 1938년 10월 18일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매일같이 미두시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쌀값에 대한 헛소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미두왕 반복창의 인생이야기는 정말 다이나믹하다. 단 1년 만에 수 백 억을 벌면서 세기의 결혼식을 열었고, 단 3년 만에 모든 것을 잃었다.
아직까지도 드라마나 영화로 다루어지지는 않은 인물이지만, 시나리오 작가들이 탐내는 소재임은 분명하다.
그의 인생을 통해 허무한 부의 말로를 보게 되는 것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